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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100년 수난을 견디고 명절이 된 ‘음력 설’의 운명
大雲  (Homepage) 2017-02-08 13:30:42, 조회 : 350, 추천 : 64



100년 수난을 견디고 명절이 된 ‘음력 설’의 운명

“양력 1월1일을 명절이라 하여서 학교에서는 전후 10여일을 방학도 하여 주지만…여관에서 슬픈 잠이나 자고, 남의 명절 구경이나 한다…그러면 우리 명절날은 아마 또 있나 하고 음력 정월 1일을 손꼽아 기다렸지만, 12월 그믐날이라 하여도 학교에서 내일은 명절이니 하나도 놀라는 말은 없고, 임시 시험을 행하거나(하며) 큰 주의를 준다. 그래서 제석(섣달 그믐날) 밤이라도 부모 형제들과 모여서 신년 맞을 준비도 못하며 친구들과 앉아서 1년 동안 지난간 일을 말하며 웃음 한번 못 웃고 방에서 고적히 시험준비나 하다가 책이 손에 있는 대로 피곤한 잠을 잤었다. 아침에 겨우 떡국이나 한 그릇 얻어 먹고, 잊어버린 듯한 세배 절이나 웃사람에 하고는 책보를 메고 나가면서 오늘 시험에 낙제나 아니하겠나 하고 영어 스펠을 중얼중얼 외우기도 하며 잘못하다가 체조선생에게 뺨이나 맞지 아니할 걱정을 하는 동안에는 명절 생각은 그만 잊어 버린다.”

지금으로부터 90여년 전인 1924년 2월14일치 <동아일보>의 ‘어느 날이 명절이냐’라는 기사에 실린 여느 조선인 학생의 음력 설 풍경입니다. 민족 최대의 명절인 ‘설날’은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1989년에 이르러서야 공식 명절 대접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1985년 이전엔 음력 설이 공휴일도 아니었죠. 한반도를 점령했던 일본 제국주의와, 광복 이후 나라를 지배한 이승만·박정희·전두환 독재 정권은 100년 가까이 ‘음력 설’의 전통을 뿌리뽑기 위해 무수한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하지만 민중들은 겉으로는 적응하고 순응하는 척하면서도 끊임없이 저항했고, 100여년의 탄압을 이기고 결국 ‘음력 설’을 쟁취해냈습니다. 그래서 ‘음력 설’은 권력 앞에 한없이 나약해지면서도 끝내 이 땅의 주인이라고 거듭 주장하는 촛불 민심을 닮았습니다. 이번 설 연휴는 주말이 포함돼 세달 동안 계속돼 온 촛불집회가 처음으로 쉽니다. 하지만 불합리한 권력에 저항해온 ‘음력 설’의 역사를 기억하며 촛불의 미래를 고민하는 새해가 되길 기원해봅니다.


■ 일본, 음력설 폐지하자 조선인들 주권 상실로 받아들여

음력설이 공식적으로 없어진 것은 1896년 1월1일이다. 대한제국을 건립한 고종은 이날부터 태양력을 공식 역법으로 도입했다. 왕실의 탄생일을 모두 양력으로 수정했고 왕실의 공식 제사와 축제를 모두 양력에 맞췄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음력 설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고종실록>을 보면 지금의 설인 음력 정월초하루를 제삿날의 하나로 삼는 오향대제도 지속됐고, 동지의 신년하례도 계속됐다. 반면 양력 1월1일에 대해서는 휴일로 지정했을 뿐 특별한 행사를 하지는 않았다. <고종실록>을 보면 1900년 1월1일엔 기록이 없고, 1월2일부터 통상적인 일상 업무가 진행됐다. 고종은 태양력 도입을 적극 장려하면서도 재위 기간 내내 음력 전통을 존중하는 이중 역법을 고수했다. 외세에 의하지 않는 주체적인 근대화 개혁에 대한 의지(양력 도입)와 동시에 일본 제국주의를 비롯한 외세에 대한 저항이라는 이중적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순종 즉위년인 1907년부터 음력 설은 물론 동지 하례까지 폐지됐다. <순종실록>은 1907년 12월 당시 총리대신이었던 친일파 이완용이 “국가의 정삭(正朔·1월1일)은 이미 태양력을 준수하여 쓰고 있습니다. 음력 원단(새해 아침)과 동지에 조하하는 의식은 이제부터 하지 않는 것으로 마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청하자 순종이 이를 허락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순종은 황태자 시절만 하더라도 음력 명절 전통을 지키는 데 적극적이었다는 기록이 있는 만큼 순종의 결정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1907년은 조선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이완용 친일 내각이 구성되고 고종이 강제퇴위된 뒤 조선 군대가 해산되는 등 일제의 침략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던 해였다. 메이지유신 이후 모든 명절과 기념일을 양력으로 바꾸고 완전한 태양력을 시행해온 일본 입장에서 대한제국의 음력 폐지는 효율적인 식민지 지배를 준비하는 과정의 일환이었다. <명절의 탄생>의 저자 하수민 박사는 음력 설 폐지가 조선인들에게 주권의 상실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졌다고 해석했다.

▲ 1999년 음력 설 연휴 마지막날인 2월 17일, 경기도 김포시 고촌면 신동마을에서 주민들이 윷놀이대회를 열어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김봉규 기자


■ 음력 설 못 쇠게 하려고…조퇴 금지, 시험 강행, 방앗간 폐쇄

1924년 <동아일보> 기사에서도 볼 수 있듯이 조선을 식민지화한 이후 일제는 음력 설 전통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 설을 구정(舊正)이라 부르며 양력 1월1일인 신정(新正)보다 낙후된 전근대적인 전통으로 치부했다. 신정을 쇠고도 구정을 쇠는 ‘이중과세’(二重過歲·새해를 두번 맞음)를 비정상적이고 비효율적인 폐단으로 낙인찍었다. 신정에는 학교에 10여일의 방학을 주고, 관공서와 기업은 공식 휴일로 지정하며 휴업을 권장했지만, 구정에는 일부러 조업을 강요하고 학생들이 학교를 빠지지 못하게 시험을 치렀다.

하지만 일제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음력 설을 쇠는 전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1928년 1월23일 <동아일보>는 “누누히 말한 바이지만 우리는 설을 하나로 통일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할 것이며 무슨 점으로 보든지 음력 설을 버리고 양력 설을 써야 한다. 그런데 시장에 가보든지 길거리를 둘러보든지 다수한 가정을 방문하든지 아직 음력 설이 양력 설보다 더 설다운 것이 사실”이라고 보도했다.

1925년 경기도 안성군청이 김태영에 의뢰해 안성군의 모든 풍습을 기록한 <안성기략>을 보면, 안성군민들은 음력 1월1일인 정월초하루와 음력 1월15일인 정월보름, 2월 한식, 음력 8월15일 추석에는 공식적인 휴일이 아님에도 민간에서는 일반적으로 휴업을 하고 선조에게 제사지내고 성묘하는 명절로 여기고 있다고 기록돼 있다. 이 네 명절은 안성에서 가장 위상이 큰 명절이었다.

음력 설은 일제 수탈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1920년대 일제의 경제적 수탈정책에 맞서 전개했던 범국민적 민족경제 자립실천운동인 물산장려운동은 음력 설에 대대적으로 이뤄졌다. 1928년 1월20일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연래로 음력 정월 초하룻날을 기회로 ‘우리의 것은 우리의 손으로’ 조선물산을 장려코저 그의 선전 행렬을 하여 오던 평양 조선물산장려회에서는 오는 정월 초하룻날도 대대적으로 선전행렬을 거행하려 준비에 분망하다”고 기록돼 있다.

일제는 침략전쟁으로 수렁에 빠져간 1930년대 후반 이후 음력 설을 제거하기 위한 더욱 강력한 조치에 나섰다. 경제 수탈을 위해 소비를 억제하고 더욱 강력한 식민지배와 내선일체를 실시하기 위해서였다. 특히 1938년부터 조선총독부는 음력 사용을 아예 금지하고, 음력 설을 쇠는 전통을 막기 위한 다양한 강제수단을 강구했다. 같은 해 1월29일 보도된 <동아일보> 기사는 “총독부에서는 물론 강제적으로 제재하는 것은 아니나 될 수 있는 대로 이중과세를 피하고 생활개선을 장려하기 위하여 각 지방의 단체를 총동원하여 양력사용 여행(勵行·강력히 시행함)과 이중과세를 방지하기에 노력하게 하고 그 수단 방법은 지방에 따라서 다소 다르나 대개로 다음과 같은 몇가지를 실행키로 되었다”며 첫째로는 음력 정월 초하루에 각 관청에서 조선인 관서는 조퇴를 묵인해 주고, 학교에서도 조선인 학생들에게는 수업을 늦게 시작하거나 오후에 폐과했던 관행을 절대 금지하고, 둘째는 각 지방에서 정월 초하루에 지방민들에게 적당한 부역을 시키도록 한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표면적으로 강제적인 제재는 아니라고 했지만 사실상 직장인과 학생이 많은 도시에서는 관공서와 학교에 사람들을 붙잡아두고, 농어민이 많은 지방에서는 강제 부역을 시키면서까지 음력 설 쇠는 풍습을 없애려 한 것이다.

<국가기록원>에 따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만 되면 상점은 2~3일간 문을 닫고, 관공서 직원들은 출근하지 않는 등 음력 설을 쇠는 전통이 없어지지 않자 강제적으로 방앗간의 조업을 금지해 제사와 떡국 상차림에 필요한 떡을 못 만들게 하고, 설빔을 해 입은 아이들에게 먹물을 뿌렸다는 기록도 있다고 한다.


■ 일제와 다르지 않은 독재 정권…방앗간 갈 때 “누가 볼세라 쉬쉬”

광복 이후 들어선 이승만 정권도 일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9년 6월4일 3·1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 등 국경일과 식목일, 한글날, 추석, 심지어 크리스마스까지 공휴일로 지정하면서 음력 설은 공휴일에서 제외했다.(대통령령 제124호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건’) 반면 신정은 1월1일부터 1월3일까지 3일간 연휴로 정했다. 서구적 근대화의 신봉론자이자 개신교도였던 이승만은 이중과세 철폐에 있어서만큼은 일본 제국주의자들보다 더하면 더하지 못하지 않았다.

심지어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1월26일에도 담화문을 발표해 “일정 때 양력 과세는 남이 시키어서 하는 것이오 우리 설이 아니라고 해서 구습을 타파하지 못한 경향이 있었으나 양력 과세는 세계 만방에서 공통적으로 실시하는 것이오 어느 한 나라의 력이 아닌 것이다. 이중과세의 폐해는 대단히 큰 것이니 음력 과세는 단연 없애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6·25 전쟁 때 한국에 체류했던 미국인 칼 밀러는 “이승만 대통령의 ‘음력설은 우리 민족의 수치’란 표어가 잊혀지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다.(<동아일보> 1963년 4월22일)

하지만 전쟁의 와중에도 음력 정월 초하루만 되면 떡방앗간에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동아일보> 1955년 1월23일자 보도를 보면, “오랫동안 계속되던 불경기도 다만 며칠이라도 풀린 듯한 기분에 상인들의 이맛살은 살포시 피어진 듯하다”고 기록돼 있다. 특히 떡방앗간은 며칠 전부터 손님들로 들끓었다고 하는데 “이는 당국에서 구정을 임박해서 조업중지 명령을 내리지나 않을까를 염려한 나머지”였다고 한다. 이승만 정권도 일제처럼 설을 앞두고 떡방앗간에 조업중지 명령을 내리는 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4·19 혁명 이후 잠시 음력 설에 대한 탄압이 사그라들었지만,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 아래서 음력 설은 다시 핍박 받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처럼 친미 기독교인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일제에 가까운 친일 근대화론자였기 때문이다. 1962년 경찰은 설을 앞두고 극장 등에 붙이는 광고물에 “구정프로”라는 문구를 삽입해 강조하는 선전을 금지했고(<동아일보> 1962년 1월25일자), 교통부는 이승만 정권 때도 운행해 오던 구정 임시열차 증편 운행을 중지해 고향을 떠난 도시 노동자들의 귀성을 막았다.(<경향신문> 1962년 2월2일자)

설을 앞둔 떡방앗간 조업 단속도 더욱 강화됐다. 강원도 지방에서 당국이 떡방앗간을 봉쇄해버렸다는 보도가 나온 뒤로 서울에서는 “어떤 아낙네건 떡방앗간을 들고 날적마다 조심성있게 두리번거리며 사위를 살피”고 “떡방앗간에 갈 때엔 누가 볼세라 쉬쉬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동아일보> 1962년 동아일보 2월2일자)

하지만 이런 조치에도 불구하고 음력 설 전통은 살아남았다. 유신 이후인 1974년에도 “서울시가 구정 떡쌀 소비를 억제하기 위해 시내 전역에 대대적인 단속반을 편성하고 특별단속에 나섰다”(<동아일보>1974년 1월19일자)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이듬해 석가탄신일과 어린이날을 공휴일로 추가 지정하면서도 음력 설은 공휴일에서 제외했다. “이중과세의 폐지와 새마을 운동 정신”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경향신문> 1975년 1월15일자)

▲ 1990년 음력 설을 앞둔 한 떡방앗간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 점점 커지는 음력 설의 휴일화 여론…결국 80년 만에 ‘민속의 날’로

전두환 신군부도 초기에는 박정희 정권과 마찬가지로 음력 설을 결코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그러나 ‘음력 설 공휴일 지정 여부’가 매년 국무회의에서 논란이 됐다는 점이 달랐다. 1980년부터 1984년까지 해마다 연초 국무회의에서는 음력 설이 공휴일이 될 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결국 여론에 밀려 1985년 음력 1월1일을 ‘민속의 날’이란 이상한 이름의 공휴일로 지정했다. 하지만 이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민속의 날’이란 이름이 처음 언급된 것은 1963년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음력 설 폐지가 쉽지 않자 1963년 1월 음력 1월1일을 ‘농어민의 날’이란 이름의 휴일로 정하는 대안을 논의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정부가 인정하는 신정 명절은 이미 양력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문제는…여전히 ‘음력설’을 잊지 못하고 있다”며 “연초 알려진 최고회의 소식은 그날을 농어민날이라는 국경일로 정해서 차라리 농어민을 즐겁게 하고 이중과세 폐단을 현실적으로 해결하려 들었다고 한다”고 보도했다. 이에 대해 민속학자 최상수는 “농어민의 날이란 것을 ‘민속의 날’로 부르게 하면 좋을 것 같다. 농어민뿐 아니라 공·상인 모두가 민속대중인데 민속의 날 하면 그말의 감각도 좋지 않겠냐”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후 언론에서 종종 ‘이토록 민중들이 음력 설을 고수하는데 차라리 음력 1월1일을 ‘민속의 날’로 지정하자’는 의견이 종종 제시돼왔다.

음력 설이 ‘민속의 날’로 공휴일이 되는 과정도 극적이었다. 전두환 정권에서 공휴일 지정 업무를 담당했던 총무처 장관은 1984년 말까지도 ‘구정 공휴일 지정은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1984년 12월 민정당이 “내년부터 구정 하룻동안을 공휴일로 지정하여 국민적 여망을 수용해 나가기로 정부 측과 원칙적으로 의견을 모았다”고 발표해버렸다. <경향신문>은 12월22일 민정당 고위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신정은 신년원단(새해 아침)으로 정착되어가고 있으므로 구정을 경조일 성격을 띤 ‘조상의 날'로 하면 국민의 여망도 수용하고 이중과세 성격도 배제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체면을 구긴 총무처가 내놓은 타협안은 명칭을 바꾸는 것이다. <동아일보는> 1985년 1월18일 “구정의 공휴지정 문제를 완강히 반대했던 총무처 측은 지난해 말 민정당이 느닷없이 내놓은 ‘구정의 조상의 날 지정 공휴화' 방침에 당황, 어떤 명칭을 내놓으면 체면도 살리며 이중과세를 용인하는 듯한 인상도 불식시키겠느냐는데 고심. 민정당이 내놓은 ‘조상의날'은 이중과세의 뜻이 내포돼있어 결국 ‘민속의 날'로 기울어지고 있다는 후문”이라고 보도했다. 결국 1월21일 대통령령이 개정돼 처음으로 음력 설이 공휴일이 됐다.

극적으로 음력 설이 공휴일이 된 것은 회유책이었다. 민중운동은 위협적이었고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들여와야 할 정도로 경제 사정은 좋지 못했다. 이면에는 일제로부터 이어져온 100년 가까이 이르는 탄압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저항하며 ‘음력 설’의 전통을 고수해온 민중의 끈기가 있었다. 당시 민정당 관계자는 “4개 공단을 조사한 결과 구정 때 업체의 91%가 완전휴무하고 관공서의 민원업무 중 80%가 감소하고 있음을 파악했다”고 말했다.

▲ 1994년 설 연휴를 앞두고 귀성객들이 모여든 서울 강남 고속터미널의 모습. 사진 진천규 기자


■ 70~80년대 노동자들은 어떻게 설을 보냈나

정부가 나서서 음력 설을 탄압했는데, 근로기준법도 지켜지지 않던 독재정권 시절에 민중들은 어떻게 설을 쇠었을까? <동아일보> 1978년 1월9일자 기사를 보면, “외국인업체 100여개가 입주하고 있는 마산수출자유지역과 40여 국내 대기업이 들어선 창원 기계공단 및 2만여명 여공이 일하는 한일합섬만산공장 등은 양력설의 연휴 외에 다가오는 음력설에도 4~5일간의 휴가를 주기로 했다”고 나온다. 이 기사를 보면 마산 수출자유지역의 1800여명의 여공을 고용하고 있는 한국동광 대표 홍구선씨는 “음력설에 고향에 가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겠다는 종업원들을 억지로 붙들어 놓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신정 연휴에다 구정 연휴까지 주고 보면 조업일 단축으로 생산에 차질이 생길 것 같아 의논 끝에 신정엔 하루만 쉬고 구정 때 4일간 쉬도록 했다”고 말했다.

<매일경제>는 1982년 12월28일 “공단지역의 대부분 기업들은 신정과 구정을 함께 쉬기로 하는 등 여전히 이중과세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기사는 “신정 휴무를 3일 이내로 계획잡고 있는 곳이 대부분이며 어떤 기업은 구정 연휴를 감안해서 신정휴무를 하루나 이틀로 단축한 곳도 상당수 있는 실정이다. 신정에 3일 휴무키로 한 기업도 대부분 구정에 2~3일씩 쉬지 않을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상여금을 나눠 지급한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며 “대부분의 근로자가 신정보다는 구정 휴무기간을 연장해줄 것과 상여금도 구정 때 나누어 지급해줄 것을 요청, 기업주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데 따른 것”이라고 했다.


■ 복권된 ‘설’…민족 고유의 명절로 확고히 자리매김

‘민속의 날’이란 어정쩡한 이름으로 이어지던 음력 설은 1987년 ‘6월 항쟁’으로 신군부가 무너진 뒤 1989년에 이르러서야 이름을 되찾았다. 각계 각층에서 ‘음력 설’을 복권하자는 요구가 물밀듯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결국 1989년 2월 정부는 ‘민속의 날’의 명칭을 ‘설’로 바꾸고, 음력 설과 추석을 3일 연휴로 하는 대통령령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을 개정했다.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정부가 ‘음력 설’을 인정한 것이다.

끝난 줄 알았던 ‘이중과세론’은 10년 뒤 다시 한번 재현되는데, 이번에는 양상이 전혀 달랐다. 아이엠에프(IMF) 금융위기로 국가적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당시 김대중 정권은 소비를 억제하고 근무일수를 높이는 등 국난 극복을 위한 수단의 하나로 이중과세 철폐론을 들고 나왔다. 김대중 정부는 “경제난국을 극복하고 이중과세 폐해를 없애기 위해 1월2일을 관공서의 공휴일에서 제외한다”며 당시 이틀 연휴였던 신정을 하루만 쉬는 것으로 바꿨다. 음력 설은 더 이상 양보할 수 없는 민족 고유의 명절로 확고히 자리잡았다.

▲ 1999년 설연휴 주말을 하루 앞둔 2월 12일, 서울역과 고속버스터미널은 미리 귀성하는 사람들로 붐볐다. 직장일로 함께 귀성길에 오르지 못한 한 가장이 먼저 가는 부인과 아들에게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있다. 강창광 기자


▣ 허승 기자 raison@hani.co.kr

[출처] 한겨레 2017년1월27일자 > 사회> 사회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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